고려시대 외세 침략에 대한 방어 전략: 천년의 격랑 속, 나라를 지킨 굳건한 방어의 역사
찬란한 문화유산과 빼어난 예술미로 기억되는 고려(918~1392). 그러나 고려의 500년 역사는 단순히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기만은 아니었습니다. 북방의 거란(契丹)과 여진(女眞), 대륙의 패자 몽골(蒙古), 그리고 후기에는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에 이르기까지, 고려는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나라의 존립을 위협받았습니다. 이러한 격랑의 시대에 고려는 어떻게 국토를 지키고 민족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요?
이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당시 고려인들이 지닌 뛰어난 전략적 사고와 지혜, 그리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민중의 강인한 저항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고려는 외세의 위협에 맞서 때로는 굳건한 군사력으로, 때로는 영리한 외교술로, 또 때로는 지형적 이점을 활용한 방어 체계로 맞섰습니다. 이 글에서는 고려 시대 각 시기별 외세 침략에 대한 방어 전략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 속에 숨겨진 고려인들의 굳건한 의지와 지혜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천 년의 격랑 속에서 나라를 지켜낸 고려의 방어 역사에 귀 기울여 봅시다.
1. 고려 초·중기: 북방 민족에 맞선 능동적 방어 (거란, 여진)
고려 건국 초부터 중기까지, 가장 큰 외부 위협은 북방에 등장한 강성한 민족들이었습니다. 특히 요(遼, 거란)와 금(金, 여진)은 고려의 생존을 시험하는 거대한 파도였습니다. 고려는 이들에 맞서 단순 방어를 넘어 능동적인 전략을 펼쳤습니다.
거란의 침략과 외교·군사적 대응 (10세기 후반 ~ 11세기 초)
거란은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까지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고려는 이 위협에 대해 유연하고 실리적인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 1차 침략 (993년, 성종 대): 서희(徐熙)의 담판
- 전략: 군사적 대응보다는 외교적 담판을 통해 실리를 취했습니다. 서희는 거란의 침략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오히려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우며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내쫓고 고려의 영토를 확장하겠다'는 명분을 제시했습니다.
- 결과: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이 살던 강동 6주(江東六州)를 확보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고려 초기 외교적 역량의 정수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2차 침략 (1010년, 현종 대): 개경 함락과 몽진
- 전략: 거란의 대규모 침략에 맞서 현종은 나주로 몽진하고, 지방의 군사력을 총집결하여 저항했습니다. 비록 개경이 함락되는 위기를 겪었으나,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 3차 침략 (1018년, 현종 대): 강감찬(姜邯贊)의 귀주대첩
- 전략: 거란의 3차 침략은 고려의 대대적인 군사적 대응을 이끌어냈습니다. 강감찬은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일차적으로 격파하고, 후퇴하는 거란군을 귀주(龜州)에서 크게 무찌르는 청야 전술(淸野戰術)과 협공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 청야 전술: 적에게 식량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농작물을 불태우고 우물을 메우는 등 모든 것을 비우는 전술입니다.
- 협공 전략: 귀주에서는 물이 불어난 강을 이용한 수공(水攻)과 대규모 병력의 협공으로 거란군을 전멸시켰습니다.
- 결과: 귀주대첩은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최종적으로 물리치고, 이후 100여 년간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여진과의 관계와 북방 개척 (12세기 초)
거란 이후 북방의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른 것은 여진족이었습니다.
- 별무반(別武班) 창설 (숙종 대): 여진족의 기마 전술에 대응하기 위해, 기병 중심의 특수 부대인 별무반을 조직했습니다. 기병(신기군), 보병(신보군) 외에 승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까지 포함된 독특한 부대였습니다.
- 윤관(尹瓘)의 동북 9성(東北九城) 개척 (예종 대):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축조했습니다. 이는 단순 방어가 아닌, 적의 근거지를 선제적으로 공격하고 영토를 확장하려는 적극적인 방어 전략이었습니다. 비록 지키기 어려워 여진에게 돌려주었지만, 고려의 북진 정책과 국방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 (현종~정종 대): 거란의 침략을 막기 위해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대규모 방어선인 천리장성을 축조했습니다. 이는 국경 방어를 위한 거대한 인프라 구축의 일환으로, 장기적인 방어 의지를 보여줍니다.
2. 고려 중·후기: 몽골 침략에 맞선 처절한 저항 (원 간섭기 이전)
13세기 초, 대륙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몽골은 고려의 존립을 뿌리째 흔들었습니다. 몽골의 9차례에 걸친 침략은 고려 역사상 가장 큰 위기였으며, 고려는 이 거대한 폭력에 맞서 처절하면서도 지혜로운 방어 전략을 펼쳤습니다.
장기 항전의 거점: 강화도 천도(遷都)
- 전략: 1232년(고종 19년) 최씨 무신정권은 몽골의 기마병에 맞서 싸우기 불리하다는 판단 아래, 수도 개경을 포기하고 강화도(江華島)로 천도하여 장기 항전을 준비했습니다. 이는 몽골군에게 약점인 해군력의 부재를 이용한 전략이었습니다.
- 강화도 방어 체제 구축: 강화도에 궁궐과 관청, 방어 시설을 대대적으로 구축하고, 해군력을 강화하여 몽골군의 해상 침투를 막았습니다.
- 결과: 강화도 천도는 몽골의 침략을 막고 40여 년간 독립적인 정권 유지를 가능하게 했지만, 육지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산성(山城) 중심의 방어: 지형적 이점 활용
몽골군은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병 위주였으므로, 평지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불리했습니다. 따라서 고려는 몽골군에게 약점인 산악 지형을 활용한 방어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 산성 축조 및 강화: 전국의 주요 전략 요충지에 산성을 쌓거나 기존의 산성을 보수하여 방어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백성들은 몽골군이 침입하면 산성으로 피난하여 항전했습니다.
- 산성 중심의 항전: 몽골군이 산성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자, 지휘관들은 산성 주변의 농지를 불태우는 청야 전술을 다시 구사하며 장기전을 유도했습니다.
- 김윤후(金允侯)의 활약: 처인성 전투(處仁城戰鬪, 1232년)에서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撒禮塔)를 사살하고, 충주성 전투(忠州城戰鬪, 1253년)에서도 몽골군을 격퇴하는 등 산성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저항을 이끌었습니다.
민중의 자발적 저항: 나라를 지킨 풀뿌리 힘
몽골과의 전쟁에서 고려 민중의 자발적인 저항은 국가 방어의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 의승군(義僧軍)과 향도(香徒): 승려들이 승병을 조직하여 전투에 참여하거나, 향도(불교 신앙 공동체) 등 민간 조직이 방어 활동과 구호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 백성들의 항전: 관리들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몽골군에 맞서 싸운 백성들의 활약이 많았습니다. 이는 문신 지배와 무신정권의 폭정 속에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민중의 의지가 살아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외교적 협상과 투항: 실리 추구
장기적인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되고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해지자, 고려는 결국 몽골에 투항하고 외교적인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 원종(元宗)의 결단: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원종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쿠빌라이 칸(忽必烈, 원 세조)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항복하고 부마국(駙馬國)의 지위를 얻게 됩니다. 이는 고려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외교적 성과였습니다.
3. 고려 후기: 새로운 위협에 맞선 대응 (홍건적, 왜구)
몽골의 간섭을 받던 고려 후기에는 북쪽에서는 홍건적, 남쪽에서는 왜구라는 새로운 외부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약화된 국력 속에서 고려는 다시 한번 총력을 기울여 방어에 나섰습니다.
홍건적의 침략과 이성계의 활약 (공민왕 대)
원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등장한 홍건적은 고려를 두 차례에 걸쳐 침략하여 개경까지 점령하는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 전략: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한 총력전과 야전에서의 대규모 섬멸전이 주를 이뤘습니다.
- 총력 방어: 홍건적의 대규모 침략에 맞서 고려는 전국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방어에 나섰습니다.
- 수도 탈환: 1362년(공민왕 11년) 이성계(李成桂)를 비롯한 신흥 무장들이 개경을 탈환하고 홍건적을 물리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뛰어난 전술과 용맹함을 보여주며 고려의 새로운 군사적 영웅으로 부상합니다.
왜구의 침략과 해상 방어 강화 (공민왕 ~ 우왕 대)
고려 후기, 해안 지방을 약탈하는 왜구의 침략은 국가적 재앙 수준이었습니다. 왜구는 한반도 내륙 깊숙이 침투하여 약탈을 자행했고, 이에 고려는 해상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 최영(崔瑩), 이성계의 활약: 최영은 내륙에서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이성계는 황산대첩(黃山大捷, 1380년)에서 왜구를 대파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 해군력 강화 및 화약 무기 개발:
- 수군의 재편: 왜구의 해상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수군을 재편하고 함선을 건조했습니다.
- 최무선(崔茂宣)의 화약 무기 개발: 최무선은 원나라의 화약 제조 기술을 습득하여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설치하고, 화포(火砲), 화전(火箭) 등 다양한 화약 무기를 개발했습니다.
- 진포대첩(鎭浦大捷, 1380년): 화약 무기를 실은 전선(戰船)으로 왜구 함대를 격멸한 진포대첩은 해상 방어 전략의 혁신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이는 화약 무기가 실전에 성공적으로 사용된 초기 사례 중 하나입니다.
- 대마도 정벌 (박위, 1389년): 고려는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對馬島)를 직접 정벌하는 적극적인 전략을 펼쳤습니다. 박위(朴葳)가 이끄는 고려군은 대마도를 공격하여 왜구의 소굴을 불태우고 포로를 구출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단순 방어를 넘어 적의 본거지를 선제 공격하는 능동적 방어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4. 고려의 방어 전략을 지탱한 요소들
고려가 이처럼 다양한 외세의 위협 속에서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했습니다.
- 지리적 이점의 활용: 한반도의 산악 지형과 삼면이 바다인 특성은 육상 강국에게는 방어에 유리하고, 해상 강국에게는 역으로 해상 방어가 용이한 이점으로 작용했습니다.
- 민족적 저항 의식: 국가적 위기 앞에서 백성들이 보여준 자발적인 저항과 희생정신은 어떤 전략보다 강력한 방어력이 되었습니다.
- 과학 기술의 발전: 화약 무기의 개발과 활용은 왜구에 대한 해상 방어력을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 외교적 유연성: 때로는 강경한 군사적 대응을, 때로는 실리적인 외교적 협상을 통해 국가의 생존을 모색하는 유연한 태도가 위기 극복에 기여했습니다.
- 군사적 리더십: 강감찬, 윤관, 김윤후, 최영, 이성계 등 시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군사적 영웅들의 활약은 국가 방어의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 방어 시설의 확충: 천리장성, 산성, 해안 방어 시설 등 전략적인 방어 인프라 구축은 장기 항전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5. 격랑의 역사 속, 고려의 굳건한 생존 의지
고려 시대는 그야말로 외세 침략의 격랑 속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이어갔던 시기였습니다. 북방의 거란과 여진에게는 군사적 역량과 영리한 외교술로 대응했고, 대륙의 패자 몽골에게는 강화도 천도와 산성 중심의 장기 항전, 그리고 민중의 굳건한 저항으로 맞섰습니다. 후기에는 홍건적과 왜구라는 새로운 위협에 맞서 화약 무기 개발과 해상 전술의 혁신, 그리고 능동적인 근거지 정벌을 통해 국가 방위의 역량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려의 방어 전략은 단일하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군사적 대응과 외교적 실리 추구, 지형적 이점 활용, 과학 기술의 발전,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받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저항이라는 복합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이 모든 노력은 고려인들이 지닌 불굴의 생존 의지와 지혜의 결정체였습니다.
천 년의 시간을 넘어, 고려 시대 외세 침략에 대한 방어 전략은 우리에게 역사의 엄중함과 함께, 국가 안보의 중요성, 위기 극복을 위한 국민적 단결, 그리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기술과 전략적 사고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게 합니다. 고려의 굳건한 방어 역사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깊은 영감과 교훈을 주는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